휘장이 찢어짐

휘장이 찢어짐 2

금성국 2014. 1. 20. 00:58

휘장이 찢어짐 2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처음 전한 이 말씀은 예수 복음의 요체라 하겠다. 내용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는 것과 회개하라는 것과 복음을 믿으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 있다. 성경적 역사관으로 하나님나라는 우리의 조상이 쫓겨난 하나님과 같이 있던 동산이다. 지금 이 세상은 무신론과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풍조가 지배하고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이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와 같이 살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동산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시하는 것이 회개하라는 것과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고 죄의 해결과 관계있는 개념이다.

 

회개하라는 말은 여태껏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살아 온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 살던 방식의 삶’ 곧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과 생활에서 돌아서라는 말이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도 있는데 반대급부적인 이득이 있을 때 만이다. 죄란 그렇게 서로 개체화된 상태를 말한다. 어원적으로 죄는 표적을 빗나갔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한다. 벗어났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겠다. 사회적 범죄인 죄도 관계를 고려치 않은 행위들이다. 도적질, 사기, 강도, 살인 등등이 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살고 있는 인간들에 의해서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회개하라고 한다. 돌아서라는 말이다.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보려면 이 망령된 세상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로 돌아 서고 싶어도 그 길이 보이는 길이 아니어서 어디로 어떻게 돌아서야 할지를 모른다. 내 몸을 돌리며 “뒤돌아 서!”한다고 돌려지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돌아서라고 한다고, 돌아서고 싶다고 해서 돌아서지지 않는다. 돌아 설 곳이 없어서 어디로 어떻게 돌아설지를 모른다.

 

회개 곧 죄의 해결은 자기가 해결하고 싶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기로 사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 중에 살게 된다. 자기중심적이 아니면 존재할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고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택한 노선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고 자기의 것을 가지려는 것이어서 경쟁적일 수밖에 없는 노선이다. 이 체재 속에 사는 사람은 이 체재 속에 사는 것이 익숙해져서 의식을 못 하는 것뿐이지 공부를 잘 하려는 것이나 부자가 되려는 것이나 다 누군가는 밀려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밀려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심해야 이 체재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죄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문제는 아담들끼리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의 문제가 아니고 소유양식이냐 존재양식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아담의 본성을 가진 이런 사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저절로 바뀌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도 없다. 거듭 나야 하는데 인간은 스스로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오셔야 한다. 인간을 동산에서 쫓아내신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셔야 한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거듭 나야 한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오셔야 해결되는 문제다. 그러면 해결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인간은 죽는다는 말이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가 죽어야 한다. 그렇게 죽어야 하나님과 같이 살아도 더 이상 죽을 것도 죄 지을 것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미 제물이 된 존재는 제물을 받을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자기가 꿈틀대는 인간은 죄를 씻을 수 없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피를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죽으면 지성소고 어디고 갈 수가 없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었어도 없어지지 않는 상태가 필요하다. 그 상태는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와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하나님나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을 가지고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의 육체의 죽음으로 휘장을 찢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는 제자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 교회가 되었다. 예수는 교회의 이름이다. 그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하나님나라로 가는 길에 있는 것이다. 예수가 길이다.

 

그래서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의 육체의 죽음을 내어놓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밖에 없게 했다.

 

믿을 것을 내어놓지 못하면 믿으라고 할 수도 없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려면 예수를 내어놓아야 한다. 예수의 이름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내어놓아야 한다.

 

복음 곧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가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죽는 사람 예수가 있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증거 할 수 없는 것이면 울리는 괭가리 소리일 뿐이다.

 

결국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죽기를 마다하지 않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렇게 다 죽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그들이 하나님의 집이요 살아있는 예수인 교회를 남겼다. 교회는 부활한 예수이고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다 그 안에 하나로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건물이 있다고 교회가 아니고 사람이 모여 있다고 교회가 아니고 예배를 드린다고 교회가 아니다. 예수가 있어야 교회다.

 

그렇게 교회로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요 예수의 형제요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자요 예수와 같은 생명을 받은 사람이요 거듭난 자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예수가 우리에게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요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으며, 영원한 아버지가 있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서 같이 살 수 있다고 믿게 했다는 말이다.

예수가 교회다. 형제와 교회를 위해 자기를 산 제물로 드린 어린양인 사람을 통해서 자기가 어찌 되든지 교회를 통해 만난 하나님이 교회와 형제와 자기와 끝까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생긴 사람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

 

그 사람이 있는 교회를 만나야 한다. 교회가 예수다. 예수를 만나야 예수를 알고 믿고 예수와 같이 살게 된다. 찢어진 휘장 너머에 있는 분을 보게 된다.

 

휘장을 누가 어떻게 찢었는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음으로 찢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 사람, 다른 세상을 만난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내게 이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도 보아야 한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