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장이 찢어짐

[휘장3] 자아-존재의 표시-의 해체

금성국 2014. 1. 20. 01:06

휘장이 찢어짐 3

“자아-존재의 표시-의 해체”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하였고 히브리서에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히 10:20)”하였다. 그의 육신이 부서짐과 휘장이 찢어짐을 하나로 본 것이다. 결국 육체 때문에 길이 막혔다는 것인데 이 육체는 인간 존재의 표시다. 죄가 사람이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의 육신의 모양(롬 8:3)’ 안에서 제단-십자가를 지셨고, 인간 존재로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도록 길을 막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존재의 해체를 통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해체시킨 것이다.』

『제단을 지난 이후 휘장이 찢어졌다. 이것은 죄 사함이나 의롭다함의 교리나 체험이 아니다. 이것은 죽음과 자아의 해체에 관한 체험인 것이다.』

『선악을 알면 하나님같이 되는 그 존재-자아의 해체 없이는 범죄와 사하심의 역사만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현래, 출애굽기2, 교회생활사, pp. 140 ~ 142에서 발췌)

 

 

‘육체는 인간 존재의 표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육체가 인간 존재의 표시라는 말은 육체가 인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표시라는 말일 터이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없으면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육체는 존재의 표시다. 육체가 있어야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육체가 없으면 존재함을 아는 기준이 없다. 뭔가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뒤에는 ‘존재-자아의 해체’라는 표현도 있다. 자아 곧 ‘나’는 더 깊은 존재의 표시다. 육체가 있어도 ‘나’가 없으면 존재자가 존재함을 알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나마나 라는 말이다. 기실 존재를 인식하는 기반이 자아다. 그래서 ‘존재-자아’라는 표현이 쓰였겠다.

 

그 육체 곧 존재의 표시인 자아가 죽을 때 휘장이 찢어졌다.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곧 자아가 해체되는 것이고 그 때 지성소가 열리고 하나님을 보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내가 해체되지 않으면 나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해체되어보지 않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나보다 더 깊은 곳에 나 아닌 다른 인식 주체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 경험이 없으면 나는 모든 것의 끝이고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거기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내가 없으면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의 이름을 물었다. 그분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답하셨다. 에흐예는 ‘나’를 의미하고 아쉐르는 ‘이다’ 혹은 ’있다’를 의미한다. 그 번역이 성경번역본마다 차이가 있듯이 듣는 사람마다 의미를 다르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곧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 “스스로 늘 있는 나” 등 여러 번역이 있다. 영어 성경은 공통적으로 “I am who(that) I am"라고 번역하고 있다.

 

교회에 와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말씀을 통해 나를 더 알아갈수록 그 글을 썼다는 모세의 마음이 깊이 알아진다. 모세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깊이 알게 되었을 때 누군가를 만난 것이다. 그분은 자신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그분의 명을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습은 보이지 아니하시고 말씀만 들리는 그분의 이름을 여쭈었을 때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이르신 것이다.

 

그래서 이 이름은 “나는 나다”라고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 의역을 하자면 “나는 너다”라고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세는 애굽에서 유대민족을 이끌어 나오도록 훈련된 유일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자기로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는 못할 일이고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말씀이 들렸다.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데리고 와라!”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명하니까 따를 수가 없었다. 40대에도 못한 일이다. 나이 이미 80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의 주인공은 뜻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씀은 모세를 지배했다. 그가 안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했다. 그래서 누구신지를 물었다. 그분은 “나는 네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다.”라 답하셨다. 어쩌면 “나는 네가 ‘나’라고 생각하는 ‘너’다.”라고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모세는 깨달았다. “우리의 더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근원이신 분, 나보다 나를 더 깊이 아시는 분, 내가 나라고 하지만 나보다 더 나이고 진정한 나라고 하실 수 있는 분, 나를 있게 하신 분, 나는 죽으면 사라지겠지만 영원히 나를 품고 존재하실 분, 아브라함이 만나고 이삭이 만나고 야곱이 만난 그 영원한 분, 이스라엘의 주인이고 이스라엘 그 자체이신 분을 만났구나.”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앞의 휘장의 찢어짐이 자아의 해체에 관한 체험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알게 한다. 내 자아가 해체될 때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겠다.

 

제물은 죽고 각이 떠져서 제단에 올려 진다. 살아있는 것은 제단에 올릴 수 없다. 자아도 살아있으면 인간을 쓰시려고 지으신 하나님이 쓰실 수 없다. 제물이 각이 떠지듯 자아가 해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존재의 표시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살아있으면 그것이 휘장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지 못하고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의 표시를 원하실 뿐이다. 나는 해체 되어 없어지고 그 표시를 원하시는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세계를 직접 보시는 것이다. 의식에서 내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눈이 자리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소망을 이루시고 인생은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해체하심으로 휘장을 찢으신 것이고 제자들은 휘장 너머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고 예수께서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은 자신의 할 일을 알고 자신을 산화시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세상의 빛이 되었다.

 

제자들이 예수가 해체되는 것을 본 그 자리에 있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자아가 해체되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르시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자아가 해체되지 않으면, 휘장이 찢어지지 않으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으면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보고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지어져서 하나님께 쓰여야 할 자들이다.

 

나 잘 먹고 잘 살아보라고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인생을 쓸려고 지으신 것이다. 피조물이 알아야 할 것이 그것이니 아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롬 8:19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야 그의 삶을 보고 자신의 의미를 알고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우리들은 그 휘장이 찢어지는 역사적 전통의 맥락 안에서 자기를 해체하여 하나님이 계신 곳을 열어 주신 분을 만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것이다.

 

죽음으로, 육체가 찢어짐으로, 자아가 같이 해체되고 자아가 해체됨으로 휘장이 찢어지고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성소가 열려서 죄와 회개가 반복되는 역사는 사라지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새로운 역사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내가 우선 살고 봐야 했던 세상은 내가 없음으로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 나라 안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