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성육신에 관한 몇 가지 생각

금성국 2014. 2. 1. 01:26

1. 믿음

하나님을 믿지 않던 어릴 때, 교회다니는 친구들과 토론을 하다보면 마지막에는 꼭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믿음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지요. 친구들은 믿어야 안다는 것이고, 내 말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믿어야 안다는 것은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게 하는 주장이라는 것이었지요. 믿음은 사실과 다를 수 있는 일종의 최면같은 것이고, 요즘 용어로 하면 일종의 스톡홀름신드롬 같은 것이어서 어울리다보면 이성적 판단을 떠나서 공유하게 되는 어떤 정서와 같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혹은 정신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참으로 다양한 것이어서 같은 경험을 가지거나 같은 카테고리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공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요구하는 모든 종교가 다 제 각각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게 됩니다.

 

2. 교리

믿음이 제 각각이긴 하지만 공유되는 부분을 서로 나누다 보면 공통되는 경험을 서로 이해하는 말로 나누게 됩니다. 그것을 기록하다 보면 텍스트가 되고 다시 그것을 정리하면 교리가 됩니다. 교리는 글로 정리되어 있어서 이해가 가능한 것처럼도 보이지만 그 바탕이 믿음에 의지한 것이어서 누구에게나 공통되게 인식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수학적 증명의 대상이 되는 정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는 범주를 가지게 되고 그것이 공유되면 정서적 안정감을 얻게 되는 틀을 가지게 됩니다.

 

3. 예수

신약성경은 예수를 증언하는 유일한 텍스트입니다. 거기에 그려진 예수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고, 성령으로 잉태된 인물이기도 하고, 초인적 능력자이기도 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초라한 인간이기도 하고,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인지케 하기도 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살아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불림받았고, 죽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요 하나님의 독생자(monogenes)요, 교회의 머리로 성경기자들에게 해석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보고도 이해할 수없었던 예수를 제자들과 사도들이 자기들이 보고 만지고 같이 살아 본 예수에 대한 증거를 성경기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보고도 몰랐던 사람이 허다한 예수인데 그에 대한 기록을 보고 이해하려하면 서로 다르게 이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공통된 이해를 성령이 하게 하신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4.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예수 이전에는 없던 용어이고, 예수 사후에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용어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심각한 분란을 겪고 여러 교파로 갈라지게 됩니다.(혹시 기회가 되시면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원제 : When Jesus became God 를 읽어보시기 권합니다.) 그 배경에는 예수를 누구라고 정의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경험은 있는데 그를 누구라고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동일본질, 유사본질의 문제가 나오고 성령이 아들에게서도 발출하느냐 아니냐 하는 필리오케논쟁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은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보유한 분이시라는 그리스도론을 바탕으로 한 삼위일체론(지금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용어의 의미조차 정확하게 모르는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이론)이 정통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추방 당하고, 동서방교회가 나누어지는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 종교의 교리는 합리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말은 교리논쟁이지만 내용은 힘의 다툼입니다. 진리를 다수결로 정한다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5.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성육신교리는 요한복음 1장에 쓰여있는 <말씀(logos)이 하나님>이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더라>는 요한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와 같이 있는 사람 중에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와 같이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서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요한은 말씀(logos)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요한은 골방이나 산 속에서 기도하다가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서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경험을 교리화 시킨 이들은 성육신이 예수에게만 나타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요한은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하나님 만남 사건은 특정 개인에게만 의지한 한정된 사건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의 해석은 달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한 사람은 요한의 기록을 자기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교회생활의 경험

제 경우에는, 그리고 많은 우리 교회식구들은, 대구교회에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성경기자들이 무엇을 보고 그 책을 썼는지를 알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을 저는 살아있는 성경을 만나는 경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성경을 만나면 성육신이나, 삼위일체 등의 이해가 새롭습니다. 물론 하나님이나 예수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집니다.

 

예수는 기왕에 알던 사람이 아니고 기왕에 알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혼자서 만난 하나님은 허상을 본 것이기 십상이고 혼자서 사랑하는 예수는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십상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만난 예수, 교회 안에서 본 하나님이 아니면 헛 것을 본 것이라고 단언해도 거의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많은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만 알고 자기가 만난 하나님만 진짜라고 주장하니 같은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7. 이단

이단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믿음에 기초한 이론은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면 모른다고 해야지 틀리다고 하는 것은 독선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대구교회는 스스로 정통이라고 주장하며 교세를 키워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가지가 다릅니다. 그러나 대구교회는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과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2,000년 전 죽은 어떤 분에 대한 기록일 뿐 아니라 지금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육신이나 부활 등의 교리를 특정한 인물에게만 일어난 사건으로 만들고는 그 인물을 하늘로 보내고 그 인물을 대신할 사제 계급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만들어내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단이라기보다 사이비들입니다.

 

8. 초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요한의 고백은 가르치기 위해 만든 교리가 아니라 요한이 교회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경험하지 않으면 교리로 접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육신이나 부활교리는 경험이 없으면 알 수 없는 교리입니다. 경험이 없으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아야 하는 강요된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구교회는 교리가 없다는 말을 더러 합니다. 교리가 없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대구교회에는 성경 외의 달리 정리한 교리가 없다는 말로 해석하시면 좋겠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살아있는 세계를 경험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세계를 만나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세계를 대구교회에 오시면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에 바탕한 고백입니다. 교리화된 이론들을 붙잡고 옳다 그르다 따져서 편가르기하는 일에서 벗어나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실 수 있는 교회로 오시기를 권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요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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