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오네시모에게 온 것

금성국 2014. 2. 4. 23:51

 

<오네시모에게 온 것>

 

 

오네시모는 도망친 노예이다. 로마시대에 노예가 도망을 쳤다는 것은 죽을 짓을 한 것이다. 도망을 가서도 먹고 살아야 하니 재물도 좀 훔쳐서 나왔을 지 모른다. 그런 주제에 또 무슨 죄를 짓고는 잡혀서 감옥에 가있게 되었다. 남은 일이라곤 죽는 것뿐이다. 거기서 바울을 만났다.

 

오네시모가 바울에게서 본 것은 무엇일까? 비록 감옥에 있지만 자신과 신분이 다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범죄자도 아니고 노예도 아닌 한 인간으로 인정하며 복음을 전하려고 다가와 뭔가를 말하는 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나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감동이 오네시모가 본 것이었을 것 같다.

 

오네시모에게 세상은 타락한 인간이 만든 추악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지으신 한 아들들의 세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죽이는 자와 죽는 자, 통치자와 피치자가 있는 차별의 세상이다. 그런데 그 세상을 자신의 죽음으로 없애버린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죽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의 마음을 사려는 한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그 바울은 노예인 자기와 같은 입장으로 내려와서 자기를 받아 주고, 자기가 바울의 말에 반응하는 것에 따라서 자기도 살아나는 한 인간이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서 자기와 함께 죽고 자기와 함께 살아나는 한 사람을 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을 만나 한 형제로 되고 점점 새 사람이 되어가는 그 생명이 자신에게도 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무엇이 바울에게 온 것인지 보았을 것이다.

 

오네시모에게 바울은 예수에 대해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었어도 주인에게 돌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오네시모의 처지였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헤아려 불의와 빚진 것까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주인의 종에서 주인의 형제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바울은 좋은 소식을 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복음이었다.

 

예수는 진리를 증거하러 왔다고 했다. 진리를 말만 하고 자기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거하러 자신이 십자가로 간 것이다. 그 예수의 증거의 길을 따라 하나님이 오시어서 부활의 세계를 여셨다.

 

오네시모에게 온 사람 바울은 “너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만 한 사람이 아니라 노예에서 해방시킨 사람이었다. 혁명을 통해 감옥을 부수고 자기를 끄집어내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자리를 바꾸어 주었다.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차별이 없는 자리로 옮겨 주었다.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었고, 세상을 사는 생명을 바꾸어 주었다.

 

예수가 복음이듯 바울 자신이 복음이었다.

 

흔해빠진 것이 성경이고 넘쳐나는 것이 말씀인 세상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보다 예수이고, 바울의 변증보다 바울이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그 분이, 그리고 그 분의 부활을 증거 할 그 분들이 더욱 더 오시고 또 오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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